매년 봄과 가을이 되면, 강원도에서 경상도까지 경기도에서 전라도까지 다양한 꽃 축제가 전국을 수놓아, 우리나라는 온통 〈꽃 세상〉이 된다.
전국의 유명한 꽃 축제에는 거의 다 가보았는데, 철원에도 가을 꽃 축제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어 철원 여행 일정에 〈고석정 꽃밭〉을 포함시켰다.
여행 첫날 아침, 철원 여행의 첫 목적지인 백마고지 전적지에 도착했을 때에 아차 싶었다. 서울보다 공기가 차고 바람이 싸늘해서 오후에 가기로 한 고석정 꽃밭의 꽃들이 무사할까 걱정이 앞섰다.
고석정 국민관광지에서 철원 오대쌀 정식을 배불리 먹고 고석정 꽃밭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꽃밭을 가리키는 안내 표지가 눈에 잘 뜨이지 않아서 당황했지만, 주차장에서 삼삼오오 걸어가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갔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고석정 꽃밭 후문에 다다랐다.
후문에서 먹거리 주막까지의 길을 걷는 동안 늦가을 매서운 바람에 먼지가 휘날리고 이름 모를 잡초들이 파르르 떠는 광경에 마음이 스산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먹거리 주막을 지나 꽃밭에 도착했을 때에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광대한 평원을 가득 채운 다양한 꽃들이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은 나뿐만 아니라 주위 모든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백일홍 군락지 앞에 설치된 나무 인형에서 고석정 꽃밭의 컨셉을 읽을 수 있었다. 노란색 얼굴과 몸통, 빨간색 코와 입, 회색 팔로 구성된 나무 인형은 세련되진 않았지만 작위성이 배제된 자연미가 돋보였다. 군민 스스로 꽃밭을 일구고, 꽃밭 이외의 것이 아닌 꽃 자체에만 치중하겠다는, 철원군의 결기를 엿볼 수 있었다.
가우라(Gaura) 군락지
원산지는 북아메리카, 개화기는 6월에서 10월, 꽃말은 〈섹시한 여인〉이다. 일명 〈정원의 꽃〉이라고 불리며 흰색 꽃은 백접초, 붉은색 꽃은 홍접초라고 한다. 바늘꽃·나비바늘꽃이라고 불린다.
지금껏 수많은 꽃 축제를 다녔지만 고석정 꽃밭만큼 거대한 천일홍 군락지는 보지 못했다. 천일홍 한 송이는 앙증맞았지만 무리지어 핀 천일홍은 여타 꽃들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천일홍 스트로베리 필드
원산지는 아메리카, 개화기는 6~10월, 꽃말은 매혹 또는 영원한 사랑이다. 잘 자라며 건조에 강하다고 한다.
〈호박터널〉은 고석정 꽃밭을 양분하는 일종의 기준선이었다. 터널 지붕에는 시든 호박과 말라비틀어진 호박 줄기와 잎사귀들이 걸려 있었는데 환하게 웃는 얼굴의 호박 모형 얼굴과 대조되었다.
경운기 비슷한 작업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널 안으로 들어오더니 내가 있던 곳 근처에 멈췄다. 작업차에 타고 있던 직원 두 명이 터널 지붕에서 호박을 떼어 내어 작업차에 싣기 시작했다. 그들의 작업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작업을 쳐다보던 내게 직원이 호박 하나를 건네주었다. 가지고 다니기가 버거워 사양하였지만, 철원의 넉넉한 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천일홍 오드리 바이컬러즈
정열적인 붉은색의 천일홍 스트로베리 필드만큼이나 차분한 자주색의 천일홍 오드리 바이컬러즈도 매혹적이었다.
양주 나리공원에서 처음 보고 그 오묘한 색상에 반했던 〈코키아〉도 있었다. 코키아의 원산지는 유럽 및 아시아, 꽃말은 겸허 또는 청초한 미인이다.
몇몇 코키아에 달아놓은 이런 장식은 도대체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 아주 칭찬해!
코키아는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변모한 후 색이 바래가고 있었다. 붉은색 절정기의 코키아를 보지 못해 안타까웠지만 코키아 너머로 보이는 백일홍이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었다.
발길을 돌려 전망대로 가다가 마주친 천일홍 오드리핑크. 귀엽고 풋풋한 10대 소녀를 닮았다.
버베나 군락지 너머로 호박터널의 앙상한 뼈대가 보였다.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고 은퇴한 은막의 여배우를 보는 듯했다.
전망대로 가는 길 오른쪽에는 실로 광대한 코스모스 밭이 있었다. 삐쩍 마르고 앙상한 줄기들이 이리저리 넘어지고 엉켜 있어 촬영은 내년을 기약해야 했다. 코스모스밭 외곽의 산책로는 길고 운치가 있어서 시간 여유가 있다면 천천히 거닐고 싶었다.
전망대는 그리 높지 않았고 옆에는 화장실도 마련되어 있었다. 어린 왕자와 붉은 여우 인형이 전망대에 설치되어 있었다. 전망대 아래에는 사진 스팟일 듯한 통나무 오두막집이 있었다.
핑크뮬리 군락지는 지금껏 보아온 것 중에 가장 넓었다. 분홍색 파도 속에 빠져들고 싶었지만 다음 여행지로 떠날 시간이었다. 핑크뮬리 군락지 안에서 가을추억을 알콩달콩 쌓고 있던 두 여인의 모습이 핑크뮬리만큼이나 상큼했다.
〈주먹돌 길〉은 감성을 위해 실용을 버렸다. 돌을 밟을 때의 달그락 소리는 듣기 좋았지만 걷기가 쉽지 않았다. 길 반대쪽에서 오던 모녀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갈 때에 어머님이 “우리 같은 사람은 이런 길이 정말 싫어” 하고 말씀하셨다. 어르신들도 많이 오신다는 점을 감안해서 길의 가장자리만 돌로 장식하고 바닥은 걷기 편한 소재로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
고석정 꽃밭은 생각보다 넓어서 체력적 소모가 컸지만 다양한 꽃, 방대한 규모, 짜임새 있는 구성이 돋보였다. 봄에는 유채꽃·청보리 축제가 열린다고 하니 내년 봄에 재방문할 생각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옛말이 무색하게 고석정 꽃밭이라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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