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평삼지천슬로시티'를 일정에 넣은 이유는 '느림의 미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이었다. 방문객들의 칭찬 일색 리뷰도 그러한 결정에 한몫 하였다.
슬로 시티(Slow City)
이탈리아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ti)의 파올로 사투르니니 시장이 시작한 운동으로서 '풍요로운 마을, 유유자적한 도시'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치타슬로(cittaslow)의 영어식 표현이다.
느림의 기술은 느림, 작음, 지속성(sustainability)에 기반을 둔다.
슬로시티 가입조건은 인구 5만 명 이하, 유기농 식품의 생산·소비, 전통 음식·문화 보존, 친환경정책 실시 등이다. 우리나라는 열한 지역이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있다.
풍한정담양댓잎메밀국수에서 창평삼지천슬로시티까지는 자동차로 30분 거리다. 창평으로 가는 내내 햇볕이 따가웠다. 지금 돌이켜보니 불길한 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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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 센터
고래 등처럼 으리으리한 방문객 센터는 점심시간이 지난 시각이었는데도 굳게 잠겨 있었다. 센터 앞에 마을 안내 리플릿을 비치해 두는 센스가 필요해 보였다. 방문객 센터 옆 화장실은 관리가 잘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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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지도
지도로 봐서는 작지 않은 마을이었다. 마을 지도 옆에는 자전거 대여소(貸與所)가 있었지만 관리자가 없어서 빌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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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삼지천
삼지천은 세 개의 천(川)이 만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삼지내 마을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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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의 마을 지도
방문자 센터의 마을 지도보다 좀 더 직관적이었다. 한낮인데도 마을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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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욱 가옥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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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게 내리꽂히는 햇볕을 헤치며 고재욱 가옥으로 가는 도중에 마을 아주머니를 만났다. 고재욱 가옥은 폐쇄되어 구경거리가 없다는 말에 마을 입구로 되돌아갔다.
아주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동아일보 편집장 출신인 고재욱 씨가 6.25 남침 때에 공산주의자들이 잡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자기 집에 들여 보호하였는데 살기등등했던 공산주의자들도 고재욱 씨의 높고 두터운 인망 때문에 그의 집에 쳐들어가 사람들을 끌고 나올 엄두를 감히 내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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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로 되돌아가면서 카메라에 담은 마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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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강 고정주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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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강(春崗) 고정주는 구한말 규장각 직각벼슬을 하다가 을사보호조약 후에 창평으로 낙향하여 근대교육의 효시인 영학숙(英學塾)과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설립하였다.
춘강 고정주 고택은 한국의 전통적인 양반집으로 안채와 두 동의 사랑채, 곡간채, 사당, 내외의 문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전라도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ㄷ자형의 남향 건물로 우측은 누(樓)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상량기록에 따르면 1913년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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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의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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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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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돌담길(등록문화재 2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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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을 통해 집주인의 취향과 손재주를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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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환 가옥(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7호)
우봉(又峰) 고재환은 일제의 자본 침탈에 맞서고자 창평상회를 세워 민간 대출과 생필품 공급에 힘썼다.
고재환 가옥은 별도의 사랑채, 삼칸채, 욕실, 화장실 등을 갖춘 특이한 주거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남도의 여느 양반집에 비하여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지어졌고 보존 상태도 우수하다.
뼈대가 굵고 치목이 잘 되어 있으며 짜임이 건실하여 전통 목조건축을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다.
굳게 잠긴 대문 틈으로 내부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이 마을이 추구하는 바가 느림의 미학인지 단조로움의 미학인지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 걷는 게 버거워졌다. 북적거림이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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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가게
이 마을에서 생산한 물품들을 판매하는 매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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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면사무소
마을길은 묘하게 이어져 있어서 방향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마을 안내 리플릿이 절실했다. 달팽이 가게 근처에 거대한 한옥 신축건물이 보였다. 창평면사무소였다.
22억 원을 들여 2014년 10월에 완공한 면사무소는 몸이 시릴 정도로 에어컨을 틀고 있었다. 입구 근처 여직원에게 마을 지도를 요청했더니 그녀는 달팽이 가게에 가보라고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였다.
달팽이 가게에도 리플릿은 없었다. 그냥, 마구, 되는 대로 '느리게' 돌아다니기로 했다. 이곳에 온 걸 진심으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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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 성당
남도의 5월 봄볕이 이토록 뜨겁고 괴로울 줄은 미처 몰랐다. 덥고 적막하기만 한 이 마을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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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枯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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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이 이쁜 집'을 둘러볼 기력은 있었지만 '아궁이가 이쁜 엿집'을 둘러볼 기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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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로 돌아오자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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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서'라는 숙박시설이 마을 입구 근처에 있었다. 이곳을 다시 찾을 일이 없을 테니 여기에 머물 일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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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었으며, 남은 건 슬로시티포비아(SlowCityPhobia)뿐이었다. 이 마을을 다시 찾을 일은 없다. 다음 행선지는 '담양 식영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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