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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맛집

보은 법주사(2017.10): 아는 만큼 보이는 법

by AOC 2017.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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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세조길 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니, 세조길 시작점 근처에 관광버스가 서 있었다. 세조길을 돌아오는 동안 단체 등산객을 보지 못했으니 아마도 법주사 관광객들을 싣고 왔을 것이다. 법주사 앞 작은 석교(石橋) 위에 파란 털모자가 놓여 있었다. 올려놓은 폼이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것 같지는 않았는데 모자의 녹색과 다리의 회색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금강문 입구에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말투와 차림새를 보니 대만 관광객들 같았다. 우리나라 늦가을의 쌀쌀함에 대해 몰랐던 듯 가벼운 옷차림들이었다. 금강문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눈길을 끈 것은 거대한 무쇠솥인 철확과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였다.

 

 

 

 

법주사 철확은 신라 성덕왕 대에 조성되었으며 높이 120㎝, 직경 270㎝, 두께 10㎝에 이른다.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솥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은행나무 밑에는 노오란 은행나뭇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런 풍경이 처음인 듯 대만여자가 나뭇잎 속에 몸을 파묻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환히 웃었다.

 

 

 

즐거운 경험이 되겠군, 하고 생각하는 찰나에 여자가 우리 말을 유창하게 구사했다. 예단(豫斷)의 위험성.

 

 

 

 

은행나무 앞에서 맞은편 산을 바라보았다. 법주사가 속리산의 이름난 절이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어떤 문화재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전조사가 부족했다. 당간지주 너머의 국보 제64호 "석련지"를 지나쳐 버렸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단풍으로 곱게 물든 산을 배경으로 거대한 금동미륵대불이 서 있다. 8m 화강암 기단 위에 놓여 있으며 높이가 33m에 달한다. 신라 36대 혜공왕 대에 진표율사가 청동으로 주조하여 천 년간 이 자리에서 법주사의 역사를 지켜봐 왔는데 조선 말 대원군의 재정확충정책에 따라 당백전(當百錢)의 재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과 조선 순종 비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시멘트 대불을 대신 세웠고, 1990년 청동미륵대불이 시멘트 대불을 대체했다. 이후 2000년부터 청동미륵대불에 순금 80㎏을 도금한 것이 바로 이 불상이다. 이 불상을 만드는 데에 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음에도 경외감이나 신비로움이 들지 않았다.

 

 

 

 

경내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국보 제55호 팔상전이었다. 신라 진흥왕 대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에 전소(全燒)되었고 사명대사가 이를 복원하였다. 황룡사 9층 목탑이나 팔상전이나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더라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목조건물로 명성을 떨쳤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국보 제5호인 쌍사자 석등이다. 신라 성덕왕 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사자의 다리에 묘사된 힘줄을 보라. 화강암을 진흙처럼 깎고 붙인 신라인들의 석공기술은 언제 보아도 경이롭다.

 

 

 

 

세 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걸었더니 다리가 뻐근했다. 법주사에서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중간의 황토길은 걸을 수도 없고 걸을 마음도 없었다. 속리산 세조길로 갈 때에 만났던 검은색 점퍼 할머니의 가판대로 갔더니 할머니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할머니께서 건네주신 더덕을 생으로 씹었는데 약간의 쓴맛과 함께 단맛이 우러나왔다. 집에 가서 고추장무침으로 요리해 먹었더니 맛과 식감 모두 훌륭했다.

 

 

 

더덕을 사면서 오늘 왜 이리 춥냐고 여쭤보니 어제까지는 날이 따스했는데 오늘 새벽에 서리가 내리더니 갑자기 추워졌다고 말씀하셨다. 세조길을 걷는 내내 손이 시려울 만도 했다. 더덕을 사는 모습을 본 옆 상인들이 장사 개시 좀 해달라고 아우성이어서 보리빵과 편강을 샀다. 둘다 맛은 있었으니 손해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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