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본 일본드라마(이하 일드)는 〈짐승의 길(けもの道)〉이었는데 1화를 보고 난 후 감동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1화에서 제기한 갈등과 복선과 세계관이 이후 여덟 개의 에피소드에서 도저히 마무리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하고 방대했기 때문이다.
탁월한 영상미, 흡인력 있는 대사, 개성이 뚜렷한 등장인물을 갖췄더라도 드라마가 엉성히 마무리되면 그 모든 것들이 하찮은 잔재주로 전락해 버린다. 서사구조는 예술성에 후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걱정은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정밀하고 탄탄한 서사를 바탕으로 예술성은 빛을 발했고 점증하던 갈등과 복선은 클라이맥스에서 단호하고 처절하게 폭발하였다.
〈짐승의 길(けもの道)〉 이후 감상한 수많은 일드 중 함량 미달의 작품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드라마는 다음 네 가지 요소 중 한두 개 이상을 갖추고 있었다.
1. 잘 다듬어진 대사
2. 심금을 울리는 OST
3. 인간과 사회에 대한 철학적 고찰
4. 메시지 전달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극한적으로 단순화한 영상
〈모래그릇(砂の器, 2004)〉은 모든 요소를 갖춘 작품이었다.
주요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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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가 에이료 | 천재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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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아사미 | 극단 〈향(響)〉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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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니시 슈이치로 | 경시청 수사1과 경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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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도코로 아야카 | 와가 에이료의 약혼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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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와 유스케 | 예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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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무라 마사야 | 카마타니시 경찰서 순사
집단의 폭력과 광기가 빚어낸 비극
#1.
이 드라마는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의 동명 원작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은 개인의 범죄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기인한다는 관점을 취한다. 원작소설에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그러한 관점이 드라마에는 완벽하고 호소력 짙게 드리워져 있다.
와가 에이료는 약혼녀 타도코로 아야카에게 "숙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숙명이란 건 태어날 때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어서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존재이자 자신의 가치야.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버린, 운명보다 잔혹한 거야」
가난하고 비참했던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모든 흔적을 감춰왔지만 자신이 그토록 도망치려했던 숙명으로 결국 되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끈질긴 수사 끝에 이마니시 형사는 와가 에이료가 살인범이라는 것을 밝혀내지만 와가 에이료의 충격적인 비화에 연민을 느낀다. 〈숙명〉의 초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와가 에이료는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올렸던 누군가를 찾아간다.
#2.
체포되기 전에 〈숙명〉을 완성하려는 와가 에이료의 처절한 의지와
미키 겐이치의 살해범을 추적하는 이마니시 쇼이치로 형사의 집요한 의지가
서로 뒤엉키고 맞부딪치면서 거대하고 장엄하며 감동적인 플롯을 형성한다.
〈숙명〉의 곡조는 피아노·교향악·멜로디언 버전으로 연주되는데, 그중에서도 와가 에이료의 멜로디언 연주는 그의 내면을 소름끼칠 정도로 담담히 묘사한다.
1화와 2화는 다소 지루하게 흘러가는데 특히 2화에는 작위적인 장면이 많아 거슬린다. 드라마의 진가는 3화부터 발휘되며, 10화와 11화에서는 교향곡 〈숙명〉을 배경으로 와가 에이료의 어두운 과거가 아련히 그려진다. 10화의 리어카 씬(23~24분)과 11화의 카메다케 기차역 씬(12~17분)에서는 극한의 슬픔이 펼쳐진다.
특히, 소문과 억측에 현혹된 마을사람들이 에이료의 아버지에게 죄를 덮어씌워 그와 그의 가정을 난도질하는 모습은 집단의 광기와 군중의 어리석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끔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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