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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맛집

보은 속리산 세조길(2017.10): 제이드가든의 교훈을 망각하다

by AOC 2017.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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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식욕·성욕·수면욕 외에 "보행욕"이 있다고 할 정도로 전국에 둘레길 열풍이다. 그러고보면 "걷기"는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한다는 단순한 동작을 넘어 호흡처럼 인간에게 필수적인 행위라고 봐야 마땅하다.

 

여행경로에서 늘 벗어나는 지역들이 있는데 속리산도 그중 하나다. 남들은 한 번 이상 가봤다는 명산(名山)이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작년(2016년) 속리산에 "어마어마한" 둘레길이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올가을에 가보기로 벼르고 있었다.

 

속리산 세조길은, 조선 7대왕 세조의 속리산 거둥[각주:1]에 얽힌 이야기에 바탕했으며, 2016년 9월에 개통하여 작년에만 70만 명 이상이 탐방했다고 한다. 관광객의 급증으로 70억 원 이상의 경제파급효과를 거뒀다고 하니, 조카를 죽인 패륜임금이라고 다들 손가락질하는 조선 세조이긴 하지만, 보은군 사람들만큼은 비난하면 안 될 듯.

 

안 그래도 유명한 곳인데 한국관광공사가 만추(晩秋) 여행지 중 하나로 추천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더 몰릴 거라 예상되어 새벽에 출발하였다. 내비게이션에 속리산 세조길이 검색되지 않아서 속리산국립공원소형주차장입구를 입력하였다[각주:2].

 

한국관광공사 만추(晩秋) 여행지

: 서울 아차산, 경기 포천 한탄강 벼룻길, 강원 강릉 노추산, 충북 보은 세조길, 전북 순창 강천산, 경남 밀양 사자평고산습지

 

 

 

 

옥산휴게소에서 라면을 먹고 속리산국립공원 소형주차장에 도착하니 아침 여덟 시가 조금 안 됐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기(寒氣)가 엄습했다. 며칠 전 춘천 제이드가든에서 이미 늦가을 추위에 고생했으면서도 방심했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소형주차장은 공간을 낭비한다고 생각될 정도로 드넓었다(탐방을 마친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지만). 주차비는 4천원으로 비싼 편이다.

2017/11/01 - [여행&맛집] - 춘천 제이드가든(2017.10): O Sole Mio!

 

 

 

속리교를 건너자 도로 좌우에 가판대가 늘어서 있었는데 검은색 겨울점퍼를 입은 할머니 한 분만 계셨다. 곶감이 좋아요, 하고 할머니께서 정답게 말씀하셨다. 순박한 얼굴에 순박한 말투였다. 지금 산으로 가는 중이라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어요, 내려올 때에 들를게요. 할머니는 근심어린 얼굴로, 그런데 이따 이곳으로 오면 다들 비슷하게 생겨서 나를 못 찾을 수도 있어요, 내가 쓴 검은색 모자 잘 기억해 뒀다가 꼭 오세요, 하고 당부하셨다. 할머니께서 지금껏 겪으셨을 기다림과 실망감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걸어도 되지만 청수교를 건너 오리숲길로 들어섰다. 오리숲길은 주차장이 있는 사내리 상가부터 법주사까지의 거리가 10리의 반인 5리여서 붙은 이름이다. 세조길까지 다녀오는 데에 얼마나 걸리냐고 매표소 직원에게 물었더니 왕복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는 대답이었다(절대 아님). 매표소를 지나 포장도로를 조금만 걸으면 길은 두 갈래로 갈린다. 좌측 길은 흙길이고 우측 길은 포장도로인데 일주문 앞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좌측 길로 들어서면 속리산 세조길 자연관찰로 입구가 나오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 길은 세조길이 아니라 오리숲길이다. 잘 다져진 오솔길은 나무들이 많지만 빽빽하지 않고 길을 따라 시냇물이 흘러서 갑갑하지 않아 좋았지만, 한기(寒氣)는 걸어 들어갈수록 배가(倍加)되었다.

 

 

 

 

저 멀리 일주문이 보이자 자연관찰로와 포장도로가 합쳐졌다. 일주문에는 "湖西第一伽藍 호서제일가람"이라고 적혀 있는데 충청도의 사찰 중 으뜸이라는 뜻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속리산 세조길이라는 표지가 또 나오는데 그 길을 따라가면 너른 솔밭이 나온다. 솔밭 끝에 법주사 안내도가 있고 안내도 우측에 문장대·천왕봉을 가리키는 화살표와 속리산 세조길이라는 표지가 있는 입구가 있다. 여기가 속리산 세조길의 진정한 시작점이다.

 

 

 

 

산 그림자가 진 길은 서늘했다. 손등이 추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춘천 제이드가든 관람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장갑을 챙겨야겠다고 다짐했던 일이 생각났지만 뒤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상수도지"와 "눈썹바위"에 다다랐다. 상수도지 위에 놓인 나무데크길도 바람과 물안개 때문에 쌀쌀했지만 햇볕이 들어 행복했다. 사람의 속눈썹을 닮은 눈썹바위는 세조가 속리산을 찾았을 때에 이 바위의 그늘 아래 앉아 생각에 잠겼다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눈썹이라는 별칭에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다. 상수도지에 비친 건너편 산의 반영이 제법이었다.

 

 

 

상수도지와 눈썹바위를 지나니 다시 산그늘이 지는 산책로였다. 방송이나 블로그에서 그토록 칭송하던 단풍은 곱지도 않았고 많지도 않았다. 너무 추워서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기대만큼의 환상적인 길은 아니었다.

 

 

 

세조길 중간지점의 화장실에 히터가 틀어져 있어 잠시나마 몸을 녹일 수 있었다. 뒤에서 등산복과 등산장비를 제대로 갖춘 세 명이 지나갔다. 문장대나 천왕봉까지 가는 듯했다. 그들이 낀 장갑이 탐났다.

 

 

 

 

중도 포기할 순 없어서 힘을 내어 "목욕소(沐浴所)"에 도착했다. 세조가 법주사에서 대법회를 연 후 복천암을 찾아가다가 목욕한 곳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명을 받은 월광태자(月光太子)가 근처에서 산책 중이던 세조에게 이 연못에서 목욕을 하라고 조언했고 세조가 그대로 따르자 그를 오랫동안 괴롭힌 피부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핑계는 아니지만 추위 때문이었을까, 목욕소를 세심정으로 착각하고 발길을 돌렸다. 해가 아까보다 높이 뜨면서 산 전체에 온기가 서서히 퍼져나갔다.

 

 

 

올라갈 때에 들렀던 화장실 아래쪽에, 뿌리가 기묘한 모양으로 수없이 뻗친 나무가 있었다. 그 뿌리 위에는 조릿대가 무성히 피어 있었다. 무수한 생명을 떠받치는 하나의 생명. 상수도지에 짙게 드리웠던 물안개는 온데간데 없고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쪼였다. 아까 본 반영(反影)은 물안개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가는 내내 추위에 떨면서 얻은 것이 상수도지의 반영 사진이었다.

 

 

 

 

세조길 입구로 돌아오니 이제서야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추워서 발걸음을 재촉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세조길 입구에서 목욕소까지 왕복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은 잡아야 한다.

 

 

 

  1. 임금의 나들이 [본문으로]
  2. 티맵으로는 검색되는데 맵피로는 검색되지 않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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